A. E. Sachs - Inherited Disorders 발췌역




{뉴요커}에서 날마다 보내주는 이메일에는 (주로 새로 올라온) 몇 편의 기사 링크와 요약문이 들어 있다. 거기서 [A Writer’s Justification]이라는 제목을 보고는 읽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활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http://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a-writers-justification

내가 처음으로 읽은 Adam Ehrlich Sachs 글이다. 제목의 justification은 ‘자기합리화’와 ‘행의 길이를 가지런히 맞춤’의 중의적 표현이다. MS 워드에서 소설을 쓰면서 다른 무엇보다 오른편의 행 길이를 완벽하게 맞추는 데 집착하는 작가 지망생의 모습을 익살맞게 그려냈다. (이 글은 종이 잡지에 실리지 않았고 웹에만 올라와 있다. 읽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Sachs는 첫 소설(집) {Inherited Disorders(물려받은 질환/장애의 대물림)}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117편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변주한다. 각 에피소드의 분량은 한 단락짜리도 있고 수 페이지짜리도 있는데 길더라도 일반적인 단편 분량보다는 적다. 독립적인 내용이어서 순서에 무관하게 읽을 수 있다.


책을 읽다가 한 에피소드의 도입부에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디어 중 하나를 직접적으로 서술한 문장을 만났다.


You think you’re learning something from someone; you always realize too late that you’re just turning to him. When you learn a little bit from someone, you’ve turned into him a little bit, and when you learn a lot from someone you’ve turned into him completely.

(103)


부자 간의 애증 관계는 우리에게 낯선 소재는 아니다. 그런데도 카프카식 유머와 다채로운 변주 덕분에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아무리 애써봐도 아버지의 기대에 못미처 슬퍼하는 아들, 아버지의 못다한 꿈을 대신 이루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아들, 아버지의 관심사에 평생 집착하는 아들, 아버지와 다르게 살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늙어갈수록 왠지 아버지를 닮아가는 아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넓은 의미의 부자 관계로 볼 수 있는 사회와 개인, 기성 시스템과 창의적인 개인의 관계도 다룬다. 아들이 두 명, 세 명인 경우도 나오고, 스승과 제자, 영향을 주고받는 예술계 선후배로도 확장된다. 코끼리의 부자 관계, 5대에 걸친 실험쥐의 진화, 아버지나 아들 노릇을 하는 앵무새와 로봇도 나오고, 아들끼리의 만남, 아들 바꿔치기 모티프도 나온다.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이 죽어서 슬퍼하는 줄 알았는데 아들을 낳은 적이 없는 부조리한 상황들이 펼쳐진다.


등장인물의 직업은 시계공이나 사업가나 살인자도 있지만 학자와 예술가가 가장 많다. 그리고 현학적인 비평가와 학계를 풍자하는 내용도 자주 나오다 보니, 일부러 고급 어휘를 사용한다. 이런 고급 어휘가 영어에서 발휘하는 효과는 우리말로 충분히 옮기기 어려울 수 있다.


인터뷰에서 Sachs는 영향을 받은 작가로 카프카, 베케트, 리디아 데이비스 등을 꼽았는데, 실제로 이 책을 읽고 카프카의 {판결(Das Urteil)}을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케트의 부조리와 오해, 어긋난 소통의 요소도 두드러진다. 간결한 서술 속에서 시치미를 뚝 떼며 아이러니와 통찰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데이비스의 영향이 보이는데, 데이비스 작품보다는 조금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키득거려서 주변 사람들이 대체 무슨 내용이냐고 궁금해했다. 사실 위에 적은 내용보다도 그저 진짜 재미있게 읽었다는 개인적 감상을 강조하고 싶다. 전통적인 소설이나 장편소설만 좋아한다면 취향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형식의 실험에 탁월하게 성공한 실험적 작품이면서도 전혀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는 점을 높이 산다. 꼭 소개하고 싶어서 몇 편을 고르면서 무척 고민해야 했다. 우열을 (또는 내 마음에 드는 순위를) 가리기 어려웠고 각기 별개의 에피소드임에도 한 권의 책으로 함께 읽는 시너지 효과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다음 링크에서 책에서 발췌한 에피소드 몇 편을 읽을 수 있다.

http://nplusonemag.com/issue-23/fiction-drama/nine-inherited-disorders/

http://www.newyorker.com/magazine/2016/02/01/the-philosophers

http://harpers.org/archive/2016/06/posturing/


인터뷰와 다른 글:

http://www.adamehrlichsachs.com/other-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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